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엉덩이 무겁게 자릴 지키고 있던 당상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청을 줄곧 없는 사람 취급했던 설도 이번에는 차분한 얼굴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닿도록 숙여야 하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일화인 설은 허리를 가볍게 숙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미천한 신...
여느 때보다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오화 전원이 참석하는 최초의 조회는 품계와 상관없이 관리 모두에게 개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직접적인 발언권은 없으나 오화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니, 수많은 관리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개정전 문턱을 밟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 그대도 오화를 보기 위해 오셨소?” “ 예. 얼굴은 알아두어야 실수하지 ...
늘어진 일광日光이 기어코 침상 안쪽을 침범했다.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줄곧 얌전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설은 쏟아지는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햇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눈동자가 의미 없이 두어 번 깜박였다. 어제 어머니를 뵈었고, 그래서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곤 묘하게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두통도 전부 가라앉았다. 기억이 끊길 정도로...
굳게 닫힌 대문 너머로 때 아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땅거미가 어둑하게 내려앉은 이 시각에 여러 마리의 말이 함께 달릴 일이 대체 무언가. 심지어 말발굽 소리는 대문 바로 앞에서 멎었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하던 시비 둘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대문을 열어젖혔다. “ 말만 있는데? 사람이 없어.” “ 진짜네. 윤기가 자르르 한 것이 주인 없는 놈이 아...
경전의 마지막 장이 덮이자 먹을 머금은 붓이 벼루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길었던 필사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필사를 마친 뒤 겹쳐 놓은 종이는 두툼한 경전 이상으로 쌓여있었다. 그러나 설은 해냈다는 성취감도, 끝이라는 해방감도 느끼지 못했다. 서안書案을 내려다보는 물색의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했다. ‘ 이런 종류의 부탁이라면 모친께 직접 하는 것이 더 빠...
태후궁의 험악한 분위기와 별개로 바깥은 완연한 봄날이었다. 햇살은 따듯하고 바람은 온화하니, 경치를 감상하기에 이보다 좋은 날은 없었다. 이즈음의 하연경(*천라의 수도)은 어디를 돌아보아도 절경이지만,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현친왕부의 산수가 으뜸이었다. 가옥의 규모에 비해 정원이 매우 넓고, 산과 폭포를 끼고 있어 볼거리가 많은 덕이다. 그 중에서도 흐르는...
태후궁의 너른 앞뜰에 가마 한 채가 내려졌다. 언뜻 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가마였으나 궁인들이 버선발로 나와 반기는 걸 보면 가마 안쪽의 손님이 범인凡人은 아닌 모양이었다. 곧 늘씬하게 큰 키의 미인이 가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태후가 워낙 총애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러들이는 탓에, 이곳의 궁인이라면 그녀를 모를 수가 없었다. 후작가인 가가의 외동딸로...
한편, 청은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심호흡부터 했다. 줄곧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깊은 숨을 뱉어내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문 하나를 넘은 것뿐인데 안팎의 공기가 이렇게나 달랐다. 저 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 귀비마마, 괜찮으십니까.” 예의 명을 받고 청을 따라나선 환관이 정중하게 물어왔다. 청의 단정한 미성이 습관처럼 긍정했다. “ 괜찮습니다.” 그 역...
“ 폐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온화한 분위기와 달리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제 귀비를 사랑스레 바라보던 예가 주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 상황을 가장 먼저 정리할 이가 누구일까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 황태자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 없군. “ 초칙은 경들의 의견과 무관하나 귀비의 대모代母인 중서령이 하는 말이...
오늘은 정 3품 이상의 고관들이 모여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조회朝會’가 예정된 날이다. 조회는 정기적으로 달에 네 번, 개정전改正殿(*황제가 집무를 보는 정전)에서 거행된다. 그러나 예법에 따라 국상 기간엔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우게 되어있어, 그동안의 현안 보고는 동연전(*황태자의 처소)에서 약식으로 치러왔다. 이제 국상도 끝났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
밤이 깊었다. 화려한 용포를 벗고 얇은 야장의만 걸친 예는,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어 대륙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넓은 어전御前을 밝히는 불은 서안(*책상) 위의 등잔이 유일했다. 등잔의 불씨가 일렁일 때마다 곧게 뻗은 빗장뼈와 우아하고 탄탄한 복근 위로 불그림자가 춤추듯 너울졌다. 지도는 태자이던 시절 부황父皇에게 하사받은 것이다. 아들에게 이런 선물...
천라의 유일한 공작가는 수도 하연경河演京 북쪽에 있다. 비록 귀족의 사가私家이나 황궁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실제 황궁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호가사好家舍다. 설이 머무는 일화당日華堂은 연못을 지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다. 기거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은 심처深處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한가에서는 다음 후계자를 가장 바깥쪽 건물에서 생활하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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